10.24
지쳤다는 말을 하기도 지쳤다.
40일을 내리 하루도 빠짐없이, 아 피렌체에서 하루 빠졌으니까 딱 하루만 빠지고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빨빨 싸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으니..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가시질 않고, 몸의 피곤함보다 무기력증이 찾아든다. 미술관 보는것도 지치고 이제 더이상 내 눈과 뇌가 새로운 시각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같고 나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 이제 더이상 새로운 감각정보는 그만! no more surprises! 라고 외치고있다. 몸이 지쳤다기보단 마음이 지쳤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 같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말도 안통하는 외국인들이 짐싸들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이 공간에서 나는 무얼하고 있는걸까. 이쯤되니 내 여행의 목적은 그렇다치고, 무엇을 위한 날들을 보내고있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 비행기스케쥴 때문에 한국에 못 들어가서 시간도 때울 겸 어쩔 수 없이 시내구경을 나가는 그런 기분이다. 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배부른 한심함이다. 이런 여유도 니스에서 마지막이야, 니스에서 재충전해서 바르셀로나에서 내 남은 여행 열정을 불태우겠어! 했는데 이미 불태울 열정따 위 남아있지 않은 것을. 이런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다. 분명 한국가서 다시 돌아보면 이 헛보낸 시간들을 미치도록 후회하겠지.
그치만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한참을 밍기적대다가 호스텔 아침 시간을 30분 남기고 아침을 먹기 위해 일어났다. 고작 바게트하나와 한입에 다 먹을 수 있는 미니머핀과 커피한잔 뿐인 아침이지만 나는 이 커피를 먹기 위해 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크레마가 살아있는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밀크를 부어주는데 진짜 내가 이 커피 마시는 낙으로 바르셀로나를 산다고 해도 정말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뭘 할까.... 어제 못간 보께리아 시장과 산타카테리나 시장을 둘러보고, 오늘은 디아고날 일라에서 하루를 보낼 작정이었다. 아이쇼핑도 하고, 모네오의 건축도 둘러보면서..! 그리고 오늘은 역사적이게도 40일동안 처음으로 내 돈주고 세탁기를 써봤다. 민박집에서 돌려주는 빨래를 하거나, 챙겨간 가루세제를 가지고 손으로 벅벅 빨고, 또는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상훈이 빨래할 때 낑겨 빨았는데 이제 정말 참다참다 어쩔수 없이 이제 더이상 입을 속옷이 없는 더러운 상황끝에 빨래를 하기로 결심했다. 3유로를 넣으면 저절로 돌아가는데, 나는 40일 여행하면서 이런 머신을 써본 적이 없으므로 빨래를 넣기도 전에 3유로를 먼저 넣어버려서 빨랫감도 안 넣은 머신이 저절로 돌아가자 깜짝 놀라 stop버튼을 눌러버리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대로 세탁기는 멈췄고 내 3유로를 그걸로 끝. 아, 이렇게 작동되는거구나..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이걸 주인님께 말하면 3유로를 돌려주실까..? 아님 내 아까운 3유로를 또 넣어야하나..? 밑져야 본전, 주인할아버지께 가서 징징댔다.
나 머신 쓸줄 몰라서 돈 넣고 stop눌럿더니 내 동전 먹어버렸어여ㅠㅠ..
주인할아버지는 친절하시다. 직접 오피스에서 나와 세탁실까지 오셔서 자신의 3유로를 직접 넣으시고 내 빨래를 돌려주셨다! 짱짱! 뭐든 요구하는 사람이 얻는 법, 우는 아기 젖준다고 이럴땐 철판깔고 무조건 말이라도 해보는게 진리다. 밑져야 본전이고 멍청하다고 욕먹어도 괜찮다. 빨래가 돌아가는 30분 동안 나는 호스텔에 머물 핑계가 생겼다. 얼씨구나고 카톡을 씐나게 하다가 내 방에 침대며 옷장에 빨래를 주렁주렁 널어놓고서 거의 오전을 다 보내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무거운 발걸음 떼었다.
오늘은 여행시작하고 두번째로 빨강니트를 입었는데 입자마자 난 후회를 했다. 역시 이 옷은 너무 튄다. 가뜩이나 없는 동양인이라 나는 어딜가나 튀는데, 심지어 쌔빨간 옷까지 입고 있으니 아주그냥 날 봐주소,하고 대놓고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이 튀는 빨강옷 덕분에 람블라스 거리에서나 보께리아 시장에서 나는 바짝 긴장하고 가방과 카메라를 꼭 쥐고 다녀야했다. 혹여나 눈에 잘 띄어서 쉬운 타겟이 될까봐..!(나혼자 괜히 긴장긴장) 오늘이 가고나면 이 옷을 당장 내버려주리라 다짐했다. 역시 뭐든 무난한 게 최고다. 어제는 문 닫아서 그렇게 한산하던 보께리아 시장이었는데, 오늘은 시장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아 오늘 시장이 아주 활짝 열어재꼈구나를 깨달은 건 쓰레기통마다 가득 차 있는 빈 과일쥬스잔을 보고나서였다. 보께리아 시장에 가면 누구나 한 잔씩은 꼭 마셔야한다는 그 알록달록한 색색의 과일쥬스. 시장 바깥에도 과일쥬스를 하나씩 빨고 다니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렇담 나도 하나. 진짜 그 색깔이 얼마나 고운지, 색소도 넣지않은 천연과일빛깔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참을 고민고민하다 스트로베리코코넛을 골랐다. 1.5유로. 와 이거 맛있따!!! 종류별로 하나씩 다 먹어보고 싶은 맛이다. 생각보다 시장은 그리 크진 않았고 관광객을 타켓으로 하는 시장이라 현지 시장의 정겨움이랄까, 암튼 현지현지 느낌은 거의 없었다. 과일쥬스 한잔 마시고 나니 배가 부르다. 아침먹고 노닥거리다가 12시에 나오니 벌써 점심때가 되어서 한 것도 없이 배고파하는 내가 진짜 한심하게 여겨졌는데 상콤한 과일쥬스로 배채우니 기분도 상콤상콤 발걸음도 상콤상콤이다.
근데 또 내 심경에 문제가 생겼다. 보께리아가 조금은 실망스러워서 산타카테리나 시장은 이제 별로 가기 싫어졌다. 벌써 갈 곳을 잃었다. 어제 못간 피카소미술관이나 가볼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스페인에서 비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식지않는 열정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식지않는 열정은 무슨, 개나줘버려 이놈에 비는 모든 열정의 불꽃의 씨마저 싸그리 꺼트리려는 듯 추적추적 잘도 내렸다. 고딕지구 안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은 정말 찾기가 힘들었다. 어찌나 구석에 있던지 관광안내 표지판도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았다. 비는 점점 많이 내리고있었다. 게다가 오늘이 월요일인게 이제야 생각났다. 월요일에 미술관가는 일정을 짜는건 초대박 멍청한짓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월요일엔 휴관을 하기 때문이다. 요일에 생각이 미치자 또 갈곳을 잃었다. 그냥 애초에 디아고날 일라로 갈걸 그랬다.
터널터널 Jasume역으로 돌아가는길이었다. 비가 너무 거세서 잠깐 어느 가게나 들어가볼까 하고 기웃거린 가게가 바로 내가 고딕지구에서 피카소 미술관과 함께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찾던 바로 그 츄레리아였다! 스페인에 오면 빠에야와 샹그리아와 함께 꼭 츄러스를 초콜릿에 찍어먹어야 한다. 그게 전통이다. 그렇게 찾을때는 없더만, 모든 건 역시 마음을 비우는 순간 실현된다. 츄러스와 초코라떼를 시켰다. 진한 쵸콜릿에 쫄깃한 츄러스를 찍어먹는 그 맛. 이거 우리나라 여대 앞에서 팔면 대학생들이 참 좋아하겠다 싶다. 근데 또 너무 기대를 해서 그런가, 따끈따끈 바삭바삭한 츄러스를 기대했는데 오늘 날이 눅눅해서 그런지 츄러스도 왠지 눅눅했다. 내 기분도 눅눅해졌다. 이 눅눅한 츄러스와 초코라떼를 가지고 무려 5유로. 가이드북에는 마드리드츄러스와 초코라떼 세트가 2.4유로라고 써져있드만, 바르셀로나가 비싼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아무리 맛있건 별로였건 내가 먹어보고 나야 그 음식은 비로소 존재한다. 나는 이것으로 내 경험안에 바르셀로나 츄러스와 초코라떼를 존재시켰다. 오늘 할 일을 했따! 야호ㅋㅋㅋㅋ .......바르셀로나까지 왔건만 하릴없이 비나 피하고 있는 신세라니, 그래도 절대 이제와서 우산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차라리 비를 맞고말지.
오늘 나는 진짜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아침에 첫 메트로를 탈 때 '오늘은 메트로를 총 3번 타고 내일 산츠역 갈때 1번을 탈 거니까 1회원 4장만 사면 T-10보다 저렴하다 룰루' 하며 1회권 4장을 한꺼번에 샀다. 그게 바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때그때 사서 바로바로 써야하는 거였다. 근데 아직까지 의문인건 그게 FGC만되는 티켓이어서 내가 못들어간건지 75분이 지나서 못 들어간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어쨌든 고이고이 모셔둔 4장의 티켓 중 3장을 고스란히 못쓰게되고 말았다. 거의 내 이틀치 밥값과 맞먹는 돈이었다. 진짜 내 짜증이 빗줄기를 타고 바닥으로 주륵주륵 흘렀다. 디아고날 일라에 도착했는데 여행 예산이 다 떨어져가는 나는 열심히 구경을 해도 난 살수있는게 없다. 흑흑 마드리드에 가면 남은 돈 싹싹 긁어서 뭐 하나라도 꼭 사주고 말꺼다.
그래도 모네오의 설계를 보니 또 신이 났다. 그 거대한 매스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는 전혀 그 거대함을 느끼지 못한다. 모네오 책에서 사진으로 일라를 봤을 땐 뭐 이런 거대한 매스를 통째로 지어놨지, 파사드도 좀 너무 오피스건물스럽게 획일적이고 별루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첨에 일라를 직접 봤을때도 좀 별루다 싶었다. 건물만 겉에서 보면 책에서 본 거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그 거대한 매스가 만약 우리나라의 대로변에 있었더라면 진짜 무식하고 답답하게 느껴졌을 거다. 우리나라는 복닥복닥하고 아무리 '대로'여도 자동차길만 '대로'고 인도는 '대로'나 '소로'나 넓이는 같으니까. 근데 이게 바르셀로나에 있으면 이 거대함도 얘기가 달라진다. 바르셀로나의 '대로'는 말그대로 大路니까. 자동차에게 있어서도 사람에게 있어서도 아주 넓은 '대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큰 매스가 한 블럭을 통채로 다 차지하고 있어도 그 앞이 뻥 뚫려있으니 오히려 상대적인 스케일이 맞는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 느꼈던 '대로'의 스케일이 '사람'의 스케일로 축소되어 아늑함 아기자기함마저 느껴진다. 굉장하다. 그리고 멋진 중정까지 있으니 말 다 했다. 날씨만 좋았다면 중정 벤치에 앉아 까르푸에서 산 브라우니를 까먹으면서 흥얼거렸을텐데, 진짜 아쉽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유럽 40일만에 가장 큰 비를 스페인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늘 해가 쨍쨍할 것만 같았던 바르셀로나인데 번개마저 치고있다. 역시 비하나 내려도 깨작깨작 내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퍼부어준다. 그래도 이런 바르셀로나도 좋다. 남들은 잘 떠올리지 못할 '비 내리고 번개치는 바르셀로나'니까. 마리아 크리스티나 역에서 또 호스텔까지 걸어온다. 거리로 보면 가까운데 메트로를 타면 한참 돌아가야해서 비가 오는 데도 그냥 걷기로 했다. 오늘은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 내 생애 마지막으로 맞는걸지도 모르는 바르셀로나의 레인이니까~ 뭐 이딴 낭만적인 생각은 물론 안했지만 이젠 걷는걸 정말 즐기는 수준이 되어서 길 생김새도 보고 특이한 아파트먼트도 보고 진짜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보면서 걷는다. 아까 멍청하게 끊어버린 티켓때문에 주륵주륵 떨어졌던 짜증도 이제 다 날라가버리고 Keane의 This is the last time을 무한반복 흥얼거리며 어제와는 또 다른길을 걷는다. This is the last time in Barcelona.
오늘은 방에 나 혼자다. 방 공기마저 눅눅해서 아침에 주렁주렁 널고 나간 빨래가 하나도 안 말랐다. 내일 아침에는 짐을 싸야되는데 내일 아침까지도 빨래가 안마르면 큰일이다. 호스텔에 들어오니 밖은 아주 비가 들이치고 주륵주륵 내리다 못해 쫙쫙 들이붓고 우르릉쾅쾅대고 난리가 났다. 내일 아침에도 이렇게 비가오면 난 큰일이다. 캐리어를 끌고 이 비를 맞아야한다면 내 마지막 기차여행이 아주 멋지게 장식되겠네.
한국이든 유럽이든, 내 옥탑방이든 바르셀로나의 호스텔방이든간에, 어쨌든 혼자있으면 하는 짓은 똑같다. 내 물건 온 동네방네 다 늘어놓고 화장실에서 고데기로 나의 꼬불꼬불한 머리를 한올한올 피며 혼자 온갖 쌩쇼를 했다. 한국가자마자 볼륨매직해야지~랄랄 이럼서. 어젯밤에 키가 훌쩍 큰 미국소년이랑 방에 같이 있었을 땐 침대에 얌전히 앉아 고이 책을 읽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만 이래?? 나만 달라??
'여행 > '11 스물셋,혼자떠난 유럽배낭여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26_유럽여행36, 스페인 마드리드(마욜광장, 푸에르타 델 솔, 성 페르난도 뮤지엄, 시내 하릴없이 걷기) (0) | 2018.04.19 |
---|---|
@1025_유럽여행35, 스페인 바르셀로나>마드리드 (아토차역, 호스텔 찾아가기) (0) | 2018.04.12 |
@1021_유럽여행33,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까사 밀라(라 페드레라), 안토니 타피에스 재단) (0) | 2018.04.10 |
@1020_유럽여행32, 스페인 바르셀로나 (MACBA, CCCB, 람블라스 거리, 아트티켓) (0) | 2018.04.09 |
@1019_유럽여행31, 니스>바르셀로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0) | 2018.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