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
이탈리아 안녕, 상훈도 안녕.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우리는 쿨하게 어깨를 한번 토닥하고 머리를 한번 쓰담한 후 헤어졌다. 총 8박 9일 동안 아침에 눈 뜰때부터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우리는 이렇게 쿨하게 헤어졌다. 그동안 참 티격태격도 많이 했지. 정말 내 화를 들들 돋웠으니까! 그래도 화를 내면 바로 입 다물줄 알고 내 짜증 다 받아줄 줄 알고 가끔 웃겨줄 줄도 알아서 우리는 별탈없이 이탈리아 일정을 마쳤다. 까탈스러운 나를 다 받아줘서 고마워. 돈없는 나에게 6:4라는 쿨한 제안을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마지막 날에는 거의 모든 돈을 다 부담해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그런 사진들을 남겨주어서 고마워! 땡큐! 메르씨! 그라치에! 카톡사진을 우피치미술관 앞에서 찍은 내 화보로 바꾸자마자 도대체 그런 사진은 누가 찍어주는거냐며 다들 사진에 대해 한 소리씩 했다. 오 이런 반응, 흐흐
밀라노로 가는 기차 안. 이어폰을 통해 Kean의 Everybody's changing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변치 않는 건 변화 뿐이라던 어떤 노래의 가사말도 떠올랐다. 또 우리의 상황은 변해서 이렇게 헤어져 각자 다른 길을 가고 있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감정도 언젠간 변해서 나중에 떠올려보면 또 다른 모습과 색깔을 하고 있겠지.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변화에 둔감해지고 있기도 하다. 여기가 분명 피렌체긴 한데 이탈리아인지 빈인지 헷갈리고 내가 봉쥬르를 해야되는지 본조르노를 해야되는지 가끔 정말 까먹을때가 있다.
가끔 생각하는데 내가 빈에서 클림트를 보며 내 없는 감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로마도 너무 재미있었고 피렌체도 참 즐거웠는데 자꾸 빈에서 느꼈던 것만큼 황홀하지가 않으니까 왠지 모르게 실망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내 전체 여행의 1/2을 족히 차지하는 중요한 일정이었는데 긴 여행을 처음해보는 나는, 모든 기력을 앞에서 다 소진해버렸다고나 할까. 장거리 경주에서 스퍼트를 너무 일찍 내버려서 경기 중반에 힘이 다 빠져버린, 페이스조절에 실패한 선수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금 가고있는 니스를 지금 이 시점에 넣은것이 참 잘한 일같다. 니스에서 쉬엄쉬엄 다시 재충전을 해서 내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해줄 스페인에서 나는 불타버리겠다.
밀라노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벤티미글리아에서 또 기차를 갈아탔다. 기차는 아까부터 계속 해변을 끼고 달리고 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파란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바다다. 얼마만에 보는 바다인지 기억이 안나. 기차는 바다옆을 달리고 나는 벌써부터 니스라는 도시에 설레이고있다.
니스. 내가 널 내일정에 끼워넣으려고 얼마나 수많은 밤을 고민했는지 아니? 남들 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마로 넘어갈때 나는 베네치아-로마-피렌체로 거슬러 올라오며(그러나 시대순이니 내가 더 좋은 루트라고 자신) 기차를 두번 씩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나의 이 수고를 아니? 피렌체에서는 그리 추웠는데 프랑스 남부로 넘어오니 바람이 하늘하늘 선선하다. 아! 좋다!
캐리어를 끌고 호스텔을 찾아 기웃거리고 있는데 라틴계처럼 보이는 프렌치남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딱 보니까 영어도 할 줄 모르는게 괜히 또 어디서 작업이나 걸어보려고 하는게 보였다. 근데 지금 내가 호스텔을 코앞에 두고 못찾고있는 상태라서 걔한테 물어나보자고 주소를 보여줬는데, 막 어~ 나 여기 안다면서 따라오라고 한다. 내가 물어봤지만 좀 수상쩍다. 길을 건너는데 미심쩍다. 분명 이 길이 맞긴 하고 나는 번지수를 못찾을 뿐인데 막 길을 건너며 따라오라고 하는게 아주 의심스럽다. 가다가 프랑스말로 카페 어쩌구 하는데 나한테 커피 한잔 하자는 말인것 같다. 아 진짜 커피고 뭐고 호스텔이나 찾아달라고. 진짜 유럽에 말이나 한번 걸어보려고 하는 시시껄렁한 남자애들 질리고 질린다. 분명 얘는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나를 이리저리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 지금 28인치 캐리어 끌고 있거든? 가방에 넷북이랑 책도 들어있거든? 한번만 더 돌리면 후려칠줄 알아. 지금 나의 이 썩어가는 표정을 못봤는지 내 왼손 약지를 가리키며 남자친구 있냐고 묻는다. 얘는 애초에 절대 나를 호스텔로 데려다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나 좀 피곤해서 자고싶다고 하니까 오케이, 이러고 정말 황당하게도 쌩 없어져버렸다. 정말 거짓말같이 눈깜짝 할 사이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뭐야 저새끼 욕이 절로 나왔다. 분명 한대 맞을 줄 알고 잽싸게 튀었나보다. 아 그냥 빙빙 돌리지 말고 아까 그 자리에서 남친있냐고 물어보고 가버렸으면 내가 이 길을 안건넜어도 됐자나 이 자식아. 다시 역으로 돌아가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보고 나서야 나는 아까 그 날라리프렌치를 만났던 곳 바로 옆에서 호스텔을 찾았다.
그.런.데. 나는 분명 8 beds Female dorm을 예약했는데 직원분은 나에게 더블베드 프라이빗룸을 주었다. 그것도 도미토리와 같은 가격인 16유로에. 비.수.기.라.서!!!!!!!!!!!! 대박이었따!!!!!!!!!!!! 이건 빈에서 호스텔 6인실을 혼자 쓰는 것보다 더 천국이었다!!!!!!!! Troyes에서 울며 얄짤없이 47유로에 묵었던 그런 호텔방에 단돈 16유로를 내고 묵는다!!!!! 날라리프렌치따위는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나는 샤방샤방 웃음을 띄며 3층으로 가는 리프트를 탔다. 우후후훟후루훌ㄹ루훌ㄹㄹ좋아라
어디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룸에는 와이파이가 안된다. 그래도 나는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룰루랄라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해변으로 나갔다.
아~ 니스!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이국적인 종려나무와 휴양휴양하는 사람들, 파란하늘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속에서 나도 흥얼흥얼 길을 걸었다. 사실 조금 신이 났다. 혼자서도 이렇게 흥얼거려본 게 빈에서 쿤스트하우스 갈 때가 마지막인 것 같다. 휴양지 왔다고 신나서 짧은 반바지를 꺼내 입었는데 정말,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이 적나라 하게 느껴진다. 아.. 내가 다시는 유럽에서 맨다리에 반바지 입나봐라. 유럽은 가슴 노출하는 것보다 다리 드러내는게 더 야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패션의 도시 프랑스에서 정말 그 말이 사실이었다. 해변에서는 너도나도 다 벗고있으면서 왜 이 정도 노출에 저 정도의 시선을 보내는건지 참 아이러니하다. 더군다나 나는 이 도시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바로는 거의 다섯명이 채 안되는 동양여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이 시선을 즐겨주겠어, 우리나라에선 이정도 반바지는 반바지축에도 못 끼거든. 난 누가봐도 이방인이니 이방인스러운 행동도 이방인이려니 하고 받아주겠지.
니스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거리를 걸었다. 난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기차를 타고 왔고 이미 시간은 저녁때가 되어서 배가고팠다. 마트나 슈퍼에서 빵이나 사먹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일요일. 문을 연 곳이 없었따! 아, 날을 잘못잡았다. 오늘은 그래, 일요일이었다. 니스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쩐지 문 연 곳이 한 곳도 없다했다. 심지어 시간도 늦어서 문을 연 얼마 안되는 곳도 닫고 있었다. 아, 이대로 오늘 저녁은 굶는건가 싶었다. 정 안되면 유럽에서도 일요일엔 문여는 맥도날드가 있어..흑흑
니스 해변하면 하이얀 백사장에 파란 지중해가 펼쳐져 있고 선탠하는 사람들, 파라솔, 야자나무가 우거진 그런 남부유럽의 이미지를 난 떠올렸었다. 내 눈앞에 이 니스 해변은 모래라곤 없는 굵직굵직한 자갈밭에 파란 지중해, 긴팔 꽁꽁 껴입고 앉아있는 사람들, 빈 파라솔이 있었다. 나는 신발 벗어들고 발목까지 바닷물을 적시며 해지는 모래사장을 걷는 낭만을 만끽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10월.. 그런 낭만따위, 신발 신고 걷는데도 자갈에 발이 아프다. 날이 추워서 바닷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다. 사실 벗은 언니오빠들을 감상하고 싶기도 했는데 조금 아쉽다. 바다와 그 앞에 나를 셀프타이머 사진으로 남기고 벌써 완벽히 내방처럼 어질러놓은 335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길에 역 앞에 정말 유일하게 문을 연 작은 슈퍼가 있어서 들렀는데 식빵이 막 2유로를 넘었다. 휴양도시라 그런지 물가가 너무 비싸다. 그 중 젤 싼 1.50짜리 샌드위치용 식빵하나를 사와서 아까 호텔주방에서 쟁여둔 자두잼과 꿀을 발라먹었다. 씨리얼도 쟁여와서 그동안 쓴 일기들을 읽으면서 아작아작 다 씹어먹었다. 이러다 영양가없게 도로 살만 찌는거 아닌가 싶다. 일찍 들어왔는데 그동안 쓴 일기를 하나하나 읽어보며 추억팔이를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됐다. 9월 18일부터 모든 일이 하나하나 기억나면서 혼자 또 쏠쏠하게 추억하다가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 따뜻한 기모후드를 입고 잤는데도 새벽에는 너무 추워서 일어나서 양말을 신고 이불을 반 접어서 두겹으로 덮고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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