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9시 27분. 로마행 기차를 탄다.
베네치아는 또다시 빠이빠이. 이로써 나는 8번째 도시와 안녕을 하고 9번째 도시와 안녕하러 간다. 나에게 베네치아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너무 관광관광하는 도시. 정말 이 곳에 현지인이라는 것이 살고있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도시였다. 나는 베니스에 환상이 있었다. 좁은 운하와 그 위를 벼랑처럼 서 있는 좁고 긴 집들. 유유히 떠다니는 곤돌라와 산마르코 광장.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가 칸에게 수도 없이 묘사한 바로 그 도시였다. 그런데 막상 온 베네치아는 관광객으로 가득한 도시. 곳곳에 즐비한 똑같은 가면과 엽서를 파는 똑같은 기념품샵과 똑같은 지도를 들고 똑같은 루트를 따라가는 관광객들만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내 환상속에 베네치아는 깨져버렸다. 원래는 오늘밤까지 묵을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바꿔서 난 실망감을 안고 하루 일찍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래도 산 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은 인정.
내 앞에는 엊그제 밤에 처음 만난 상훈이 앉아있다. 참.. 여행이라는게 신기한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엊그제 밤에 처음 만난 사람이랑 같이 기차를 예약하고 호스텔을 잡고 같은 방에서 잔다. 근데 심지어 이 오빠는 여자친구도 있는데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같이 로마를 가서 같은 호스텔 믹스룸에 묵는다는 것에 어느 거리낌도 없다.
여행와서 여러사람을 만났다. 런던에서 수염이와 유진, 파리의 수빈, 뮌헨에서 옥토버페스트를 함께한 창현과 세영, 빈 쇤브룬 궁전에서 현기, 빈에서 베네치아로 오는길에 우연히 또 만난 소현과 그 일행,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를 같이 타고있는 내 앞에 상훈까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인정한다 하는 하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치고 속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격이나 그런건 서로 안맞을 수 있지만 그냥 마음, 선천적인 속내는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고 실제로도 내가 느꼈으니까. 서로 도움도 주고 받고 외로움도 달래고 그러면서도 결코 얽매이지 않는 그런 쿨한 관계들이 바로 여기있다. 쿨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여행을 오라! 후후
어젯 밤에 예산을 점검해봤는데 이럴수가, 외환은행에 쟁여둔 100만원을 다 쓰고 4만원밖에 남지 않았다. 환전해간 650유로를 다 쓰고 또 현금카드에 100만원까지 다 써버린거다. 헐.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이제 여행의 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내가 허투루 막 쓴것도 아닌데. 돈 아낀다고 맨날 2유로도 안되는 샌드위치로 연명하고, 교통비가 아까워서 그렇게 거리를 걸었건만.
충격도 그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이것 다 빈에서 먹은 18유로짜리 말도안되는 점심과 입장료 때문이다. 애증의 빈. 내가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넌 내게 모욕감, 아니 패배감을 줬어. 이제부터는 정말, 정말, 정말 미친듯이 아껴야한다.
이제 민박은 절대 머물수 없다. 아무리 밥을 푸짐하게 준다해도 난 머물 수 없다. 당장 로마도 원래 예약해둔 호스텔에서 하루에 18유로짜리 더 저렴한 호스텔로 바꿨다. 어떡하지.. 정말 돈이 떨어지면 아빠한테 헬프쳐야 한다. 10월 용돈을 가불해서 20만원 만이라도 넣어달라고.. 흑흑 ㅠㅠ 한국가서도 돈 남겠다고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판단미스, 장난아니다. 친구들 할머니 삼촌고모 선물은 커녕 나 밥사먹을 돈도 없겠다. 이것 참 큰일!
로마행 기차는 10유로를 내면 1시간 반짜리 빠른 열차를 예약할 수 있지만 예약없이도 4시간 반짜리 레지오날을 탈 수 있다. 돈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무조건 후자다. 나는 무조건 후자다. 동행 잘못 만난 상훈도 나를 따라 후자다. 나는 항상 이래왔기 때문에 네시간을 타던 다섯시간을 타던 일기쓰고 음악듣고 하면 시간이 후딱가는데, 내 앞에 상훈은 아주 지루해 죽으려고 한다. 한 번의 갈아탐도 없이 네시간 반을 달려서 3시. 로마 떼르미니역에 도착을 한다.
로마다. 바글바글 북적북적 로마다. 소매치기 조심해야하는 로마다.
또 잔뜩 긴장을 했다. 호스텔은 떼르미니역에서 걸어서 5분정도 밖에 안되는 THE YELLOW.
간판은 분명 THE YELLOW인데 왠 BAR가 있다. 알고보니 BAR 뒤에 리셉션이 있다. 이 호스텔도 밤에 장난아니겠구만. 우리방은 2층. 다행히 리프트가 있는데 이 리프트 완전 미니여서 최대 2명이 탈 수 있고 짐들고 타면 한 명만 탈 수 있따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귀엽다!
우리는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있어서 한명씩 한명씩 올라가서 우리방으로 들어갔는데 와. 장난아니네. 장난아니게 더럽네. 6인실 믹스룸에 우리까지 6명이 모두 다 체크인 해 있었는데 남자 둘에 여자 둘인것 같았다. 그런데 이 여자 둘이 장난 아닌거라. 테이블에 온갖 술과 먹을거와 화장품 파우치가 늘어져있고 침대에는 속옷 이불 배낭 고데기 온갖 것들이 늘어져있었다. 정말 얘네들 나보다 심했다. 내가 고른 저렴한 호스텔이라 난 그냥 그런가부다 했는데 상훈은 표정이 안좋은 것 같았다. 왠지 좀 미안해졌다.
시내로 나왔다. 무작정 저녁 시내투어를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훈과 함께 다닌 로마는 내가 지도보고 찾아가며 걸은 일이 없어서 로마시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릿속에 들은게 없다(내가 '이곳을 찾아가자!' 하고 목적지를 정하면 상훈이 알아서 찾아가주었다). 빈은 정말 샅샅이 기억이 나는데 로마시내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게 또 혼자 여행과 같이 여행의 차이다. 같이있으면 편하지만 편한만큼 내가 스스로 얻는 것이 적어진다.
일단 목적지는 스페인 광장. 어찌어찌 걷다보니 스페인광장이 나왔는데. 와, 그 계단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 앉아있다. 로마관광객 다 여기있네~ 사진찍는 사람들, 앉아서 얘기하는 사람들, 기념품상인들 한데 아우러져 난장판도 아니었다. 정말 로마는 대단하다! 걷다가 트레비 분수도 지나고 그 유명하다는 명품거리로 지난다. 피자를 두조각 사서 베네치아 광장에 앉아서 사이좋게 잘라먹었다. 조금 식었는데도 배고파서 그런지 맛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먹는 첫 피자다! 이탈리아 피자는 어디서 사도 무조건 맛있다는데 음.. 식어서 그런가? 그렇게 감탄할 만한 맛은 아닌것 같다. 나중에 시내투어 중에 가이드님이랑 같이 간 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마르게리따를 먹고나서 이때 먹었던건 그냥 길거리 음식이었구나~하는걸 깨달았다.
피자를 먹고있는 내 왼쪽으로는 로마의 유적이 정말 말도 안되게 통째로 보존되어 있다. 이래서 로마인가. 그 이름도 찬란했던 로마. 로마에 지하철이 A,B선 두개밖에 없는 이유, 지하철 공사 좀 하려고 땅만 팠다하면 유적이 발굴되어서. 그래서 지하철 C선의 공사는 무기한 연장되었단다. 사실 이런것도 조금 부럽다. 동대문터에도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몇개월 만에 뚝딱뚝딱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여전히 짓고있다. 현재보다 과거를 중시하는 도시.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하는 도시. 어느 쪽이 더 맞는 정답일까?
저녁 산책을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문제의 여자친구들 두명이 노래를 틀어놓고 흥얼대며 크레이지나잇을 즐길 채비를 하고있다. 한 명은 통통했고 한명은 노랑 곱슬머리였는데 이 저녁에 이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와는 생활패턴이 다르다. 정말 이 호스텔에 있는 동안 한번도 우리는 같은 시간대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바톤 터치를 하듯 우리가 들어오면 이 친구들은 나가고, 아침에 우리가 나가기 조금 전쯤 어느새 들어와 자고있다. 어찌보면 편하기도 한데 새벽에 들어와 시끄럽게 굴때면 짜증이 나기도 한다. 애들은 다 나가고 우리만 남았다. 씻고나서 삐걱대는 이층 침대에 올라앉아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누웠다. 오늘은 또 로마에서 잠을 잔다.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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