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 레오폴드 뮤지엄
어젯밤 호스텔에서 만난 현기와 쇤브룬 궁전에 함께 가기로 했다.
사실 궁전 같은 곳은 혼자가면 심심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 (궁전은 내취향이 아니라서) 쇤브룬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현기가 같이 아침 일찍 갔다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8시 반에 나는 호스텔 로비로 나왔다. 세영과 킴제에 가는날보다 더 일찍 나왔다. 미쳤다고 어제 새벽 2시까지 밀린 빨래를 하고 엽서를 써대서 너무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어제 사다놓은 식빵 아침도 못 먹고나왔다. ㅠㅠ 결국 가는길에 마땅히 샌드위치를 사지 못해서 쇤브룬궁전에 도착해서야 2유로가 넘는 허접한 애플파이 비스무리한 걸 겨우 하나 먹었다.
현기는 정말 스스럼없이 아무 사람들한테나 길을 잘도 물었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75L 짜리 배낭을 메고 여행을 온 그는 참 활기차고 화이팅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쉴새없이 말을 하고 다녀온 곳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도 다녀온 곳에 대해 얘기할 때면 평소 말이 잘 없는 나도 신나서 맞장구 쳤다.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을 만나서 좀 미안하다 싶을 정도로 그는 재밌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쇤브룬 궁전은 좀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투어 입장료는 역시 오스트리아답게 비쌌는데, 젤 싼 임페리얼 투어는 쇤브룬 궁전에서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정원은 아예 들어갈 수 없다. 내가 빈에 와서 국제학생증으로 한번도 입장료 할인 못받았어도 그래,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정말... 흑흑투어종류가 단계별로 있는데 가장 싼 것부터 임페리얼투어, 그랜드투어, 클래식, 골드투어 등이 있다. 가장 저렴한 투어는 당연히 가장 조금 보여준다. 내가 다녀본 어느 미술관, 또는 궁전 중에 가장 비싸다. 어제까지만해도 '빈은 입장료값은 한다'고 생각한 나는 이 곳 쇤브룬에서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얼마나 멋있나 보자 했는데 정말, 맛보기만 보여준다. 궁전의 방들 몇개를 슬쩍슬쩍 보여주고 나서 끝에 가서는 오디오가이드가 '이제 여기서부터는 그랜드투어를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와...................ㅋㅋㅋㅋㅋㅋ 서럽다. 임페리얼 투어는 쇤브룬의 유명한 정원은 풀 한포기도 안 보여준다. 베르사유에서는 무료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을 '너는 돈 조금 냈으니 보지도 말라'는 식이다. 정말 철저히 들어가는 입구부터 달라서 창문에 모조리 블라인드를 쳐놓고 그 정원을 창문으로도 안보여준다. 보려면 그랜드투어는 커녕 클래식까지는 사야 정원을 갈 수 있다.
쇤브룬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다. 쇤브룬의 '쇤'은 아름답다는 뜻이란다. 아름다움도 돈을 내야 아름다움인가.. 가이드북은 쇤브룬궁전에 별표를 세개나 쳐 놓았지만 나는 하나도 쳐주지 않을테다, 라며 속으로 심통도 좀 부려봤지만 소박하지만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궁의 느낌은 좋았다. 베르사유는 미칠듯한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혼을 빼 놓지만 쇤브룬궁전은 그에 비하면 소박하다. 프란츠요제프 2세가 검소한 삶을 살아서 그렇다고 한다. 투어는 금방 끝났지만 그래도 위안이 됐던건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있다는 것! 깨알같이 음악도 나오고 실제 프란트요제프 2세의 음성도 들려준다. 가이드를 들으며 둘러보니 그럭저럭 끄덕이며 돌았다. 한국어 오디오가이드의 힘은 가히 위대하다.
다들 여행오면 외국인이랑 대화를 양껏 못해서 정말 영어공부해야지 하며 뼈저리게 느낀다던데, 나한테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건 현지 친구들과의 대화보단 오디오가이드다. 어느 나라건 영어 가이드는 기본으로 있는데 한국어가 있는 곳은 정말 20곳에 1곳을 꼽으래도 없으니. 영어 오디오가이드를 듣고 있으면 얼추 알아듣긴 하지만 이게 잘 알아듣고 있는건지, 내가 감상을 하는건지, 영어듣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가이드에 너무 집중하게 되어서 작품을 깊이 감상할 수가 없게 된다. 영어 오디오를 자유롭게 들을 수만 있어도 미술관을 100배는 더 재밌게 볼 수 있을텐데.. 얄팍한 듣기 실력이 이럴때 무척 아쉽다. 쇤브룬을 다 둘러보는 대에는 한시간 남짓이 소요되었다. 살짝 실망한 마음을 안고, 나의 이 실망감을 달래줄 곳으로 난 갈테다.
이제 드디어. 드.디.어, 드으으으디이이이이어어어 내가 빈에 온 그 이유, 그 이름도 자유로운 클림트를 보러간다!!!! 거룩한 벨.베.데.레 궁으로!!! 근데 여기 또 공사한다. 아나 진짜 유럽 어딜가나 공사를 안하는 데가 없네. 벨베데레 앞 호수좀 찍을려고하는데 공사하고 아찐짜. 벨베데레 궁으로 들어간다. 클림트를 위해서라면 비싼 8유로의 입장료도 나는 아깝지 않아. 1층..2층.. 클림트를 마지막에 두고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를 보고, 흥미도 없는 고전까지 보고 나서야 설레는 마음을 안고 클림트 방 앞에 섰다. 마치 팥빙수를 먹을 때 가장 맛있는 체리를 마지막까지 남겨두듯이. 으 두근두근하는데 실망하면 어쩌지. 너무 기대하고 보면 안될텐데.
아..
빨간 벽에 고요히 걸려있는 황금색 키스. 무릎꿇은 여자를 부둥켜안고있는 그 찬란한 그림 앞에 섰다. 우..와.. 아무리 기대를 해도 그 기대의 끝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이 그림을 수도 없이 봤지만 난 마치 처음보듯 감동해 버렸다. 모나리자는 너무나도 귀하신 몸이라 실재를 영접했을 때 오히려 그러려니 했는데 이 키스하는 남녀 앞에서니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랑 손잡고 본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 그렇다면 왠지 사랑이 이루어져서 영원하게 만들어줄 것만 같은 그림이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는 키스가 젤 유명하지만 내가 젤 좋아하는 작품은 키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유명한지 나는 정말 뼈저리게, 아니 눈이 저리고 마음이 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클림트를 다시한번 너무 사랑하게됐다. 흑흑, 나의사랑 구스타프. 그리고 내가 젤 좋아하는 양귀비들판 앞에도 섰다. 초록 들판에 점점이 박힌 빨간 양귀비. 사랑스러우면서도 쓸쓸한 작품. 난 또 너무 감성적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아빠도 꽁이도 놀치모임도 다 보고싶다. 옆에 있는 현기에게 '저기 저 그림의 모델이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자인데 클림트가 죽고나서도 30년이 넘도록 클림트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살았대', 구구절절이 얘기했다. 오늘만큼은 나도 수다쟁이. 아는척 한다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뭐 하나라도 어느 누구와 나누고 싶었다. 상투적이지만 키스의 책갈피를 사길 참 잘했다. 볼 때마다 그 때의 감동이 떠오른다.
여기서 현기와는 안녕. 그는 4시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간댔더라, 암튼 또 떠난다고 했다. 나는 어제 빈 미술사 뮤지엄에서 받은 팜플랫에 나온, 재미있어보였던 레오폴트 뮤지엄에 가기로 했다. 클림트 한방으로 빈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베스트도시가 됬다. 클림트! 빈! 부라보!
빈에는 참 뮤지엄이 많다. 빈 하면 오케스트라와 클래식이 생각나서 미술관도 고전미술관이 많을 것 같은데 19세기 빈분리파 덕분인지 근현대 미술관도 은근히 많다. 빈 미술사박물관 바로 옆 블록에는 뮤지엄쿼터라고 큰 뮤지엄덩어리가 자리하고 있는데, 레오폴트 미술관은 뮤지엄쿼터를 이루고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이다. 뮤지엄쿼터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건물부터 전시가 심상치않다. 학생들이나 아마추어 작가들의 템퍼러리 전시인 것 같은데 꽤나 재미가 있다. 잠깐 둘러보고 레오폴트 뮤지엄으로. 레오폴트 뮤지엄에는 에곤 쉴레전이 열리고 있었다. 정말 빈에서는 클림트와 에곤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를 빼면 어떠한 미술관도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에곤 쉴레의 그림은 하나같이 불안불안하다. 불안한 선처리, 불안한 시선, 불안한 색채. 어딘지 모르게 가냘프고 그러면서도 내면에는 고집있으면서 또 상처입었을 것 같다. 에곤쉴레의 초상화를 보고는 왠지 재석선배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후후
그리고 이곳엔 클림트도 있다. 그 심오해 마지않는 의학. 그리고 철학. 나한테 '의학'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하얀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선생님을 그려놓을 것 같다. 이런 유치원을 못 벗어난 사고력같으니.
임신한 여인. 생명. 클림트는 생명을 표현했다. 의학이란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클림트답지 않은 무채색의 커다란 그림. 보는 것만으로도 심오해지고 경건해질 것만 같은 이 그림을 클림트는 거절당했다. 이유는? 너무 심오하다면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행정한다는 사람들은 다 예술을 알아보는 감각을 지녀야한다. 타고나지 않으면 배우기라도 해야한다. 학생 때부터 문이과 예체능을 나눠서 너는 인문학만해 너는 수학만해 하는 체계속에 자라서, 배운건 인문학밖에 없고 할줄 아는것도 인문학, 이런 사람들이 행정한다고 건축허가를 내고 한강 르네상스니 하면서 정작 예술가 건축가들이 내놓은 설계안은 다 고쳐먹고 거절하고 예술을 예술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문학을 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중에 이 작품이 이렇게 큰 가치덩어리가 되어서 저 멀리 한국에서도 이 그림을 보러 오는 학생이 있다는 걸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미술관 건물로 둘러싸인 뮤지엄쿼터 안 중정 풍경이 참 활기차다. 옐로우 박스와 메론을 깎아놓은 듯한 옐로우, 핑크색깔 벤치들이 동그라미들을 그리고 있고, 그 위에 삼삼 오오 햇살을 맞으며 간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넷서핑을 하고있다. 정말 관대하고 센스있게 이 곳에서는 야외에서도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는데 심지어 무료다! 네모 연못이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고, 연못 주위에 앉아 나는 카톡을 하며 달콤한 푸딩을 먹었다.
오늘은 클림트로 충만한 날. 한에 돌아가면 클림트를 다시 한번 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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