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
어제 하릴없이 푹 쉬었으니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7시 47분 기차를 타고 9시 반쯤에 뮌헨에 도착해서 10시에 오픈하는 피나코텍까지 걸어가려고 했는데 일어나보니 7시 30분이었다. 7시 47분 기차는 무슨 개나줘버렷, 하, 기차시간이 걸려있으면 늦잠은 절대 용납이 되질 않는다. 긴 한숨을 쉬며 게으른 나를 조용히 자책했다.
8시 44분 기차라도 타고 되도록 일찍 가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여행 시작 이후로 가장 빨리 나온 날이었다!
유랑에서 만난 동행들과 12시 반 쯤에 만날 예정이어서 피나코텍을 빨리 갔다오지 않으면 뮌헨 일정 내내 갈 시간이 없다. 내일은 월요일이라 휴관하기 때문이다. 분명 옥토버페스트에 가면 6시 전에 피나코텍을 가는건 꿈도 못 꿀 일이겠지.
레겐스부르크 역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경찰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모든 레겐스부르크의 젊은이들이 다 이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가는 것 같았다. 남녀 할것없이 전통복장을 색색이 차려입고 아침부터 손에는 이미 맥주를 한 병씩 들고서 미친듯이 떠들고 있었다. 그 만원 기차 안에서 나는 용케 어느 할아버지 옆에 자리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 깨다 한시간을 달렸다. 내 바로 옆에 서 있는 덩치남자는 내 머리 바로 위에서 코를 아주 드러드렁 풀어대고 있었다. 내 머리위에 뭔가라도 하나 튀었을것 같은 찝찝함에 온 몸이 움츠러들었다.
뮌헨 중앙역. 여긴 뭐 아침에 레겐스부르크는 뭐 그냥 쨉도 안된다. 마치 고연전이 끝나고 연대에 5:0으로 필승전승압승한 승리감에 미쳐 날뛰는 참살이길의 그 밤을 방불케했다. 그런데 그 풍경이 이 아침 10시에 벌어지고 있다. 말도 안됐다.
정말 기차 안에서부터 사람들은 맥주를 병째 마시더니 손에 맥주를 안 든 사람은 이 뮌헨 중앙역에서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 것이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는 독일인들의 세계 3대 축제 옥토버 페스트의 한복판인 것인가.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피나코텍 방향으로 나오자마자 그 떠들썩함은 온데간데 없고 단지 그냥 평범한 주말의 오전 풍경이 펼쳐졌다. 뭐지?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 온 것 같았다. 그 떠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거지?
젊은이 아저씨 아줌마 할 것없이 다 페스트에 미쳐있다보니 피나코텍으로 가는 길은 정말 한적하니 그지없었다. 독일은 날씨가 그리 우중충하다더니만 뒤셀도르프에서부터 지금까지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런던에 있을때도 비 한방울 오지 않고 아주 좋았는데 여행 날짜 하나는 탁월한것 같다! (라고 적는순간 내 징크스에 의해 반전될수도 있다.)
어쨌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피나코텍 가는길은 아주 들뜬 기분!
피나코텍 모데르나.
알테 피나코텍, 노이에 피타코텍과 함께 피나코텍 시리즈를 이루고 있는 뮌헨의 현대미술관이다. 나는 알테와 노이에는 건너 뛰고 현대미술관만 감상하기로 했다. 현대미술관 답게 깔끔한 외관과 날렵한 얇고 긴 기둥, 그리고 하얀 인테리어가 그야말로 모더니즘의 상징같다. 지금 피나코텍 모데르나에서는 작가 세 명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Judd ..어쩌구(까먹었다ㅠㅠㅠㅠ)라는 가구디자이너의 전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작가는 철저한 기능주의여서 기능에 입각한 형태, 그리고 그 외에 어떤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마인드를 갖고 아주 미니멀한 가구를 만든다. 늘 컨셉과 프로그램과 대지에 적합하는 형태는 오직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와도 비슷한 생각이어서 공감이 갔다. 전시를 보다보니 시간이 없어서 기념품샾에 먼저 들러서 쏘한테 쓸 엽서를 하나 샀다. 꼭 뮌헨에서 엽서를 보내기로 여행 오기전에 약속을 했다. 엽서는 어제 먹은 내 저녁값보다 비싼 2유로. 그치만 너무이쁘다 :) 2층 회화작품도 빠르게 둘러보았는데 피카소의 말년 작품이 정말 눈길을 끌었다. 피카소는 인생 전체가 전성기였지만 특히 입체파그림을 많이 그릴 때의 피카소랑은 너무 다른 분위기와 표현이어서 피카소 그림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작품들이었다. 소재도 피카소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여인이 아닌 산과 집과 나무등의 풍경이었는데 말년의 피카소는 다시 순수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르 꼬르뷔지에의 롱샹 성당이 생각났다.
피나코텍 모데르나의 내부구조도 너무 좋았다. 내가 또 계단에 미치는데 여기는 비밀스럽게 돌아가는 계단과 넓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를 또 신나게했다. 12시 20분이 다 되어서 너무 금방 둘러본 아쉬운 피나코텍 모데르나를 뒤로하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카를스광장 쪽으로 향했다.
창현. 나이는 비밀. 조금은 사무적이던 문자 말투와는 달리 잘웃고 사근하고 영화배우 박용우를 닮은, 웃는 얼굴이 보기좋은 오빠였다. 여행와서 동행은 처음 구하는거라(출발할때 같이온 미리 알았던 동행들 제외) 뻘쭘할까.. 잘 안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만나서 중앙역까지 즐겁게 웃고 얘기하며 걸을 수 있었다. 2시 쯤에 두번째 동행분도 만났다. 세영. 이름이 약간 중성적이어서 내가 정말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남자였고, 카톡사진에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분이었다. 반전이었다ㅋㅋ 세영을 보니 문득 시드니에 살던 시절 밀튼컬리지를 같이 다니던 사무엘이 생각났다. 그런 스스럼없고 순수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우리도 옥토버페스트는 처음인데 그런 우리한테 막 저건 뭐에요 이건 뭐에요를 연발하며 먼저 만난 창현과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정.말. 모.든. 뮌헨과 그 근교의 젊은 남여, 아줌마 아저씨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뮌헨의 관광객 모두는, 지금 여기 이 곳에 와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한 걸음에 한 명씩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갈 수가 없었다. 까딱하면 일행 잃어버리는 건 한 걸음 내딛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동안 설치했다는 놀이기구들은 이곳을 평소에도 놀이동산이라고 해도 한치도 의심없이 믿을 수 있을 만큼 많고, 또 제대로였다! 놀이기구가 있다고 해서 뭐 그냥 월미도의 디스코나 미니 바이킹, 회전목마 쯤이겠지 했는데, 자이로드롭에 후룸라이드에 디스코, 범퍼카까지 제대로였다. 역시 월드클라스의 축제는 다르구나 싶었다. 입이 안 다물어지고 넋이 나갔다. 이걸 내일 모레 폐막이 지나면 다 치운다고?? 치우고 나면 그냥 광장이라고?? 헐.. 말도 안된다. 1년에 한 번씩 에버랜드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과 똑같았다. 치우자마자 내년 페스트 설치 준비를 해야할 것만 같다.
배가 고파서 소세지빵을 하나씩 사먹고 먼저 놀이기구를 타러 갔다. 가장 재밌어 보이는 걸로는 후룸라이드, 가장 무서워 보이는걸로는 완전 높이 360도 도는 걸 탔다. 두번째 껀 진짜 재미있었다! 롯데월드 자이로드롭도 손놓고 타는 내가 소리를 빽빽 질렀다. 와.. 짱이다! 창현은 타기 전에는 엄청 무서워하다가 다 타고 나면 뭐야 짧네~하며 허세를 연발했다ㅋㅋㅋ 여행와서 늘 혼자이다가 오랜만에 사람들이랑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놀이기구도 타고 군것질도 하니 막 너무 들떠서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소세지빵, 놀이기구 2개가 합쳐서 18유로. 진짜 비쌌는데 그래도 오늘만큼은 정말 하고싶은 건 다 해야지!
이제 맥주를 마시자! 곳곳에 펼쳐진 맥주천막으로 들어가는데 다행이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줄도 안서고 바로 들어갔다, 오예! 와, 대낮부터 광란의 천막이 요기있다. 맥주를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 셋이 어리버리하다가 어찌어찌 한잔씩 사들고 테이블에도 자리를 잡았다. 천막 중앙에서 밴드가 신나게 연주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따라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 노래 가사를 알면 나도 따라하고 싶었다. 그치만 가사를 몰라도 흥얼흥얼. 신난다! 맥주를 마시면서 그제서야 잠시 담소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앗 그런데 뭐야, 이 분들 알고보니 같은 회사다! 세상 참 좁다!
나는 대학생, 세영은 이제 막 취업에 합격한 졸업예정자, 창현은 직장인으로 우리는 사회 계층의 한 단계씩을 하나씩 밟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세영은 창현의 회사에 다른 부서에 합격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제 세영이 나랑 같은 대학교면?! 우리는 아주 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 아쉽게 연대였는데 그것도 뭔가 동질감 느꼈다ㅋㅋㅋ 암튼 재밌게도 세상은 참 좁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난 휴학해서 그렇다쳐도 아직 학기 중인데 취업에 미리 합격해서 열흘 여행을 왔다니.. 좋겠다ㅠㅠ 그리고 축하의미로 짠.
맥주는 큰 잔이 무려 7유로나 했는데 한 잔을 마시고나니 너어-무 배가 불렀다. 예약석이라 테이블에서도 쫓겨나고 우리는 페스트를 나와서 근처 펍으로 들어갔다. 세 명이 작은 맥주 세 잔에 요리 하나를 시키니 종업원 아저씨가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포크를 세 개를 달라고 하니 더 이상하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요.. 독일식 족발이라는 슈바이넨 학센은 정말 쫄깃쫄깃 맛있었다! 처음먹어보는 음식이었다. 특히 으깨서 다시 뭉친 것 같은 사이드로 나온 포테이토는 정말 찰진, 그, 아으 그, 암튼 굉장히 맛있었다. 다시 뮌헨을 간다면 또 오고 싶은 곳이었다. (아쉽지만 식당 이름은 기억이안남 ㅠㅠ)
미술관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술도 마셨다. 이 많은 것을 했는데 아직 시간은 7시였다. 광란의 축제에 갔다오니 기분은 마치 11시는 된 것 같은데, 시간을 보니 왠지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시간. 창현은 숙소가 뮌헨에서 세시간이 걸리는 프랑크푸르트여서 이제 슬슬 기차를 타러 가야한다고 했다. 세영과 나는 마리엔광장 쪽으로 가서 맥주를 한잔 씩 더 하기로 했다. 카를스 광장을 지나 노이하우저 거리로 들어섰다. 밤이라 상점들은 다 문을 닫았지만 페스트의 여운이 여기저기 너울너울거리고 있었다. 배는 부른데 갈증이 나서 버블티를 하나씩 사먹었다. 나는 쟈스민티에 레몬, 그리고 오렌지버블을 추가했는데 그 맛은 정직하게 쟈스민티에 레몬맛이 났다. 세영오빠 것은 그린티였는데 어쩐지 코코넛타피오카 같은 맛이 났다. 첫 모금은 오묘했는데 중독성있었고 우리의 갈증은 다 해소되었다.
시청 앞 바닥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곧 9시가 되면 저 유명한 시계탑에 인형들이 나와서 빙글빙글 돌꺼야.
잔뜩 기대를 하고있었다. 그때 아까 펍에서 잠깐 만나 얘기를 나눴던 독일아저씨를 우연히 또 만나서ㅋㅋㅋ 또 잠깐 얘기를 했다. 지금은 피앙세랑 장인어른이랑 같이 놀러왔고, 현재는 슈타트가르트에 사는데 뮌헨에 예전에 7년 동안 살아서 이 곳을 잘 안다고 했다. 우리가 시계탑에 인형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자 9시에는 안 나올꺼라면서..... 12시에만 나오는 것같다면서.... 우리를 실망시키고 가버렸다ㅠㅠ 훙 정말이야? 그래도 기다려볼래.
9시가 땡 치고 정말 인형이 나왔다! 우왓! 근데 메인 인형은 아니었고 양 옆에 나와 있던 천사인형이 빙글 돌다가 다시 들어갔다. 메인 인형이 12시에 나오는 것 같았다. 뭔가 조금 아쉽다. 너무 짧고 시시한 인형극이었다. 내일은 꼭 12시에 와봐야지, 생각했지만 그 다음날 뮌헨을 떠날때까지 메인 인형은 보지 못했다.
레겐스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다. 9시 24분 기차는 이미 놓치고 10시 44분 기차를 기다려야했다. 중앙역은 아직도 옥토버페스트에 만취한 흥부자들의 흥겨운 흥청망청함이 가득했다. 이런 곳을 혼자 지나가기엔 왠지 무서울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세영이 기차시간까지 기다려주어서 무사히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이미 사람들이 꽉꽉 앉아있었고 나는 한시간을 서서 가다가 겨우 마지막 10분을 앉아서 갔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피곤하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고연전에 뒤풀이까지 하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피곤함과 맞먹는 것 같다. 피곤한 마음에 밤 12시가 넘어서 혼자 걸어가는 레겐스부르크의 밤길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보니 눈이 동그란 말레이친구는 떠나고 내 밑 침대 친구도 떠나고 새로 온 노랑머리 친구가 귀엽게 입에 주먹을 대고 자고있었다. (담날 아침 일어난 모습은 내 예상과 달리 덩치가 매우 큰 친구였다.)
여행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늘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늘 들어온다. 그 것이 너무 익숙해서 어떤 사람이 항상 그곳에 있으면 '저 친구는 왜 안가지'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땐 누군가가 떠나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여행 중'이라는 상황은 참으로 특별하다.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다른, 말 한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과 한 방을 쓰고 2층 침대에 위아래로 나란히 자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 땐 여행할 때 뿐 일거다. 여행은 참 순간적이다. 내가 짐을 내려놓으면 이 곳이 내가 잘 곳이요. 이곳은 내가 잠시 왔다가, 또 왔는지도 모르게 떠나는 일회성 공간. 너도, 나도, 내 침대 밑에서 자고있는 노랑머리 친구도 일회성 사람. 그들에게 나도 '내 침대 위층에서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미 떠나버린 검은머리 친구'겠지. 어딘가에 적을 두지 않고 떠도는 느낌도 그리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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