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
또, 또 기차를 놓쳤다. 이제 기차 놓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도대체 이 유럽기차란 놈은 언제 어디서 어떤걸 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지하철처럼 5분, 10분 기다리면 오는것도 아니고 기본이 한시간이니..
멀어져가는 내 기차의 뒤꽁무니를 보고있는 그 때의 기분은 마치 막차를 눈앞에서 놓친 술취한 대학 신입생의 기분이랄까.
그래서 오늘도 1시간 40분을 더 기다려 드디어 탄 Manheim행 기차 안에서 일기를 쓰고있다. 오늘 아침 4시 10분, 어젯밤 흑인언니와 분홍변태에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간 47유로짜리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곧바로 Troyes역으로 향했다. 무조건 5시 5분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배가 고프다. 식사는 커녕 제대로 된 샌드위치 하나 먹은게 없다. 롱샹을 다녀온 어제는 하루종일 1.10유로 짜리 과자 한 봉지와 0.80유로 짜리 팽오쇼콜라 하나 먹은게 전부다.
역에 도착하니 또 흑인여자 두명이 앉아 있었는데 다행히 어제 그 언니들은 아니었다. 대기실에서 물티슈로 세수를 하고 양말을 벗고 바지를 갈아입는 것으로 보아 나와 같은 가난한 여행자인가 싶기도 했는데, 다행히 나에겐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텅 빈 첫차에서는 가방을 베고 넓은 의자에 누워 한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세상모르게 곯아 떨어졌다. 그리웠던 파리 팬션에 도착해서 드디어 만난 나의 캐리어ㅠㅠ 흑흑... 이틀동안 이 주인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구나. 팬션 사장님 고맙습니다 ! 뒤셀도르프 기차편이랑 숙소가는길 등을 재빨리 검색해가지고 파리 동역으로 향했다.
RER B선은 오늘따라 왜 이리 느린지. 이제 두 정거장밖에 안갔는데 역에 멈춰서서 문을 열어두고 출발할 생각을 하질 않는다. 나는 자꾸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는데 열린 문은 닫히질 않고. 4호선이 빠르게 가준 덕분에 8시 45분에 도착!
9시 9분 열차를 타자, 9분 열차를 타자...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예약해둔 기차는 7시 4분 기차였지만 도저히 Troyes에서 첫차를 타고 7시 4분 열차를 탈 수 없어서 그냥 9시 9분 기차를 탔다. 역무원이 검사하면 놓쳐서 어쩔수 없었다고 사정이라도 할 참이었다. 당연히 역무원은 유레일패스와 예약표까지 꼼꼼히 검사를 했고 이 기차가 아니라며 글을 못 읽는 어린 양에게 설명하듯 7h04라는 글씨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이.기.차.아.니.야.~'라고 얘기해주었다. 저도 알아요.. 저 기차 놓쳤어요. 어제 파리에 도착했어야했는데 벨포르에서 기차문제로 오늘 아침에 도착했단말이야. 그래서 놓쳤어요..
내가 탄 9시 9분 열차는 예약비가 20유로인 더 비싼 기차였지만 그 사실을 얘기만 해주었을 뿐 고맙게도 다행히 더 받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 내가 몰랐던 건 기차를 갈아타고 목적지로 갈 때, 처음 타는 기차의 목적지는 환승역이라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멍청하게도 그 생각을 못했다. saarbrucken에 내려서 분명히 dusseldorf로 가는 기차가 있어야 했는데 같은 시간에 다른 역으로 가는 기차가 있어서 당황당황 어리버리를 까며 시간을 버리다 info에 물어보니 그 기차가 그 기차였다! 환승역이 ko..어쩌구였는데 나는 그걸 다른 도착지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나는 환승을 해야한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어느 역에서 환승을 해야하는지를 몰랐던것이다.. 엊그제어제오늘 온갖 바보짓을 다 떨고있다. 1분만 덜 어리버리떨고 일찍 물어봤더라면 분명 탈 수 있었을 텐데. 3분 남았어 뛰어가!라는 말에 17키로짜리 캐리어를 끌고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뛰어갔지만 결국 떠나가는 기차의 뒤태를 보며 멍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기차란 아이는 매정하고 도도해서 결코 기다려주는 일 따윈 없고 지하철마냥 역에 서 있는 시간은 고작 1-2분밖에 되질 않으며 환승 시간도 짧으면 7-9분이어서 그 사이 나는 낑낑대며 캐리어를 들고 내려서 전광판을 보고 플랫폼을 찾아 맞는 기차를 확인하고 또 낑낑대며 타야하는데 이것이 정말 나에겐 너무, 너무 어렵다.
내 기차의 뒤꽁무니가 멀어지는것과 동시에 오늘의 나의 쾰른이 멀어지는 걸 보았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하면 오늘 쾰른에 다녀오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기차역 카페에서 사치스럽게 스콘과 라떼를 먹으며 넷북도 충전하고 핸드폰도 충전하고 이것저것 정보도 검색하며 여유를 부렸지만 나에게 남은건 멀어진 콜룸바 뿐이었다.
그래도 콜룸바를 포기해가며(완전한 포기는 아니고 어떻게든 갈꺼지만) 기차환승의 경험을 얻었다. 이제 조금 감을 잡은것도 같다! 물론 아직 뒤셀도르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어찌될지 모르지만ㅠㅠ
콜룸바를 오늘 못가게 되어서 내일 가자니 인젤 홈브로이히 갈 시간이 촉박한데 거기는 또 버스가 한 두시간에 한대꼴로 다니는 곳이어서 여차하면 롱샹꼴이 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레겐스부르크 가는날 아침에 다녀오자니 내사정모르고 여유로운 콜룸바는 12시에 문을 열어서, 그때 다녀와서 레겐스부르크를 가면 또 저녁 7시나 그쯤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면 반나절씩 나의 일정이 계속계속 뒤쳐지게 될게 분명하다. 시간이 여유있다면 좋으련만, 암스텔담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일정은 내가 아무리 캐리어를 끌고 전력질주를 해도 자꾸자꾸 엉켜만 간다. 아.. 매정한 기차시간이여!
그리고 더 큰일인 건 과한 전력질주로 인해 내 캐리어 손잡이가 점점 뜯어져가고 있다.
Manheim에서 잘 갈아타고(!) 드디어 뒤셀도르프에 도착했다. 아. 드디어. 정말 드디어 ㅠㅠ 내 일정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는것인가. 호스텔을 찾아가는데 같이 버스를 탄 남자 두 명이 말을 건다. 호스텔 찾냐며 자기도 백패커 가는길이라고 ㅋㅋ 정말 한국인처럼 생긴 일본인과 독일인 친구였다. 이름은 닝크?와 완이었는데 백패커를 찾아가는 동안 닝크는 매너있게 내 캐리어를 끌어주고 10유로라며 조크를 던졌다.
드디어 나는 짐없이 외간 곳에서 이틀밤을 자는 고생을 뒤로하고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것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친절한 리셉션오빠가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내 침대는 2층의 2층 침대의 2층이었다. 뒤셀도르프 백패커는 생각보다 너무 깔끔하고 아기자기하며 다~~~ 좋았지만! 다만 한가지 2층 침대에 사다리가 없다는 것. 난 매일 아침과 밤에 내 머리높이의 침대로 담을 넘듯 뛰어 올라야만 했다. 이건 파리팬션의 3층 다락방 계단보다 심해서 정말 한번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방을 배정받은 후 꾀죄죄한 몰골을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왔다. 닝크와 그 친구는 아까 오는길에 오늘 쾰른에 간다고 같이 가자했는데 내려와보니 샤워를 하는지 어쨌는지 암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계획을 수정하여 쾰른은 내일 가기로 했으니 오늘은 뒤셀도르프 시내구경에 나서기로 했다.
리셉션 오빠는 너무 친절하고 귀여워서 자꾸자꾸 이것저것 물어보고싶다.헤헤 내 무거운 캐리어를 2층으로 올려다줄 때 와우, 유 스트롱! 했더니 쑥쓰러워하는데 완전 귀요미ㅋㅋㅋ 내가 버스 티켓을 비싼걸 끊어서 친절하게 싼 버스티켓 끊는 법을 종이에 적어주고 나 오늘 밤에 어디 갈까? 했더니 지도를 펴들고 여기가 좋고, 여기는 쇼핑센터고, 여기 가서 야경도 봐! 하며 루트를 친절히 일러주었다. 와우, 그레이트! 나이스~ 베리 해피!를 연달아가며 리액션을 해주고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아! 고생 끝에 도착한 뒤셀도르프는 느낌이 좋다!
시내를 걷다보니 여기 너무 좋은거아냐?
메타 세콰이어길이 도심 한복판에 펼쳐져 있고 마치 압구정과 홍대와 한강변과 남산타워가 하나로 붙어있는 듯한 시내 풍경에 여행자는 아주 신이 났다. 모든 것을 한 큐에 볼수 있는 최고의 동선이었다. 리셉션오빠 땡큐! 라인 강변을 따라 노천 맥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라인강에는 고래같은 배가 부웅- 지나가고, 강가 벤치에는 사랑하는 연인들, 천막에는 즐거운 친구들의 맥주 파티가 열리고 길거리에는 신난 쇼핑객들이 분주하다. 분홍꽃으로 장식한 인력거가 지나가고 극장 앞으로 기대에 찬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여긴 정말 활기찬 도시구나. 도시의 모든 모습이 이 한 공간에 모두, 그리고 아주 조화롭게 버무려져 있었다. 프랭크 게리의 근사한 현대건축물과 전통 독일건물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
뒤셀도르프 너무 좋다!
신나서 구경하며 걷다가 걷다가, 분위기 좋은 강변을 걷다가 시끌시끌한 맥주천막도 지나고 조명이 근사한 다리도 지나고 라인타워에 다다라서 표를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68m를 올라가서 뒤셀도르프 야경을 내려다 봤을 때까지. 그때까지 조그맣던 외로움은 차곡차곡차곡 쌓여서 발밑으로 라인강을 내려다 본 그 순간에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마음이 펑- 하고 터져서 나는 멍- 한 상태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68m를 내려와서 다시 조명이 근사한 다리를 지나고 여전히 시끄러운 맥주천막을 지나고 로맨틱한 강변도 지나 호스텔 2층의 2층 침대의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잠이 들었다.
좋은 곳을 가면 반드시 그 댓가로 좋았던 만큼의 외로움을 안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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