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벨포르 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남은 시간은 두시간. 십분만 더 일찍 일어났더라도 나는 지금쯤 롱샹 성당을 보며 하염없이 감동에 젖어있겠지. 아! 게으른게 죄다.
여행에서 꾸물거리는 것만큼 죄악은 없다고 생각하며 재빠른 행동력으로 탈리스취소를 한 나를 칭찬해준게 바로 어젠데. 하필 기차도 자주 다니지 않는 이런 외진 곳에서 게으름을 떨다니 나는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
그 이름도 경건한 롱샹성당에 가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벨포르에 와서, 벨포르에서 하루에 2번 정도 있는 롱샹가는 기차를 갈아 타야한다. 어제 벨포르에 남은 호텔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hotel F1으로 왔는데, 오늘 아침 벨포르역 가는 버스를 늦게 타서 지금 이러고 있다. 어찌어찌 벨포르까지 왔건만 롱샹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기차 시간 만을 기다려야 하다니. 그래도 이대로 파리로 돌아갈 순 없다. (내가 돌아갈 곳이 서울이 아닌 파리라는 게 신기하다!) 난 꼭 롱샹을 보고야 말겠어!! 네시간 쯤이야 역에서 일기 쓰다보면 금방 지나가겠지. 하하하 !
오늘 아침 호텔 아저씨가 친절하게 전화도 걸어줬지만 택시를 못잡고 버스를 기다리며 아까운 2분을 보냈다. 버스는 sms로도 요금을 낼 수 있댄다. 신기하다! 어떻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80..어쩌구 번호를 적어줘서 그냥 버스번호인 4를 쓰고 그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보내지네? 뭐 냈겠지ㅋㅋ 버스는 초조한 나를 태우고 벨포르마을을 쉬엄쉬엄 굽이굽이 돌아돌아 드디어 벨포르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초조하게 내린 시간이 7시 51분. 롱샹가는 기차는 52분인데 마침 기차가 서 있어서 허겁지겁 탔건만 Mulhouse행이었다. 이미 롱샹행은 떠난 뒤였던 것이다. 버스 시계가 조금 느렸던거다! 이미 기차는 떠났는데 나는 혼자 괜히 초조해하고 있었던 거다. 롱샹과는 반대 방향인데 이걸 어찌해야하나 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던 사이 기차는 출발하고 그래 뮬루즈에 가서 어떻게든 해보자는 마음으로 타긴 했지만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뮬루즈에 가기 전 간이역에 내려 다시 벨포르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 이 대담하지 못한 영혼이여.
기다리는 동안 뒤셀도르프가는 기차나 예약해놔야겠다.
근데 한번에 가는 기차는 자리가 없단다. 아니 뭐 이렇게 사람이 많냐고. 늘 뭘 예약하든 자리가 없단다. 아무거나 예약하고 그냥 타고 싶은 열차에 타서 빈자리에 앉아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예약해 달라고 했다.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데 트랜스퍼하는 바람에 1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열차다. 그 한시간이 여행자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이 기차역 직원은 알기나 알까. 오늘은 나에게 한시간도 아닌 오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ㅠㅠㅠㅠ 아, 그 오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이렇게 파리날리는 벨포르역 대기실에 앉아 하염없이 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여행도 익숙해져간다. 이젠 이런 당황스러움이 재미있기도 하다. 파리같은 대도시가 아닌 이런 시골마을에 오니 사람들도 너무 친절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파리였다면 그냥 '방없어 꺼져'하고 말았겠지. 왠지 롱샹에도 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12시 20분 롱샹가는 기차를 탄다. 코치가 2개 밖에 없는 아주 귀여운 로컬기차이다. 나는 드.디.어 롱샹을 가는구나!
롱샹역은 정말 정말 정말 작은 간이역이다. 내가 살던 호주 아타몬역도 되게 작다 생각했는데 롱샹역에 비하면 아타몬은 매우 큰 역이다. 역무원도, 티켓창구도, 심지어 티켓끊는 기계도 하나 없이 딱 코치 2개 분량 크기의 플랫폼 위에 벤치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정말 귀엽다.
드디어 롱샹이구나! 이 작은 마을이 너무 귀엽다. 공기도 맑고 나무도 많고 집들도 귀엽기 그지없다. 롱샹 성당이 그냥 Ronchamp chapel인줄만 알았지 노트르담 어쩌구.. 인줄은 몰랐다. 그건 당연히 다른거겠거니 표지판을 지나치니 갈 곳을 잃어버렸다. 근데 이 귀여운 마을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내가 길을 물어볼 문을 연 가게도 없다. 오늘은 평일인데 이 동네 조금 이상하다. 앗! 유일한 사람그림자! 빵집에서 일하는 귀여운 청년한테 물어보니 아 샤펠~ 자기 안다면서 언덕 위로 올라가라고 가르쳐준다. 고마웡 메르씨부끄 !
아니 동네 동산도 안 올라가는 내가 프랑스 그것도 이런 시골마을까지 와서 등산을 하고 있다니, 가방도 무겁고 햇빛은 뜨겁고 더워 죽겠다. 그런데 배실배실 웃음이 나오고 대도시의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다니는 것보다 훨씬 기분좋음을 느꼈다. 정말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었고, 정보도 잘 모르는 롱샹에 짐도 없이 이렇게 나혼자 왔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랍다.
사실 꼭대기에 올라가면 드넓은 대관령같은 잔디가 펼쳐지며 그 위에 우뚝하니 롱샹이 하얀자태를 뽐내며 서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공사판이 나타났다. 말그대로 공사판이었다. 왜 그렇게 트럭들이 나를 지나쳐 산을 올라갔는지 이제 알았다. 롱샹은 공사중이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롱샹이 아닌 롱샹 밑에 주차장이 공사 중이었다.
롱샹은 건축물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기하학적이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느낌에 그랬다. 그리고 르꼬르뷔지에는 사진에 이쁘게 찍히도록 설계를 했다는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나, 무튼) 이건 뭐 어떻게 찍어도 예술이다. 뭐 본판이 예술이니 사진도 당연히 예술이겠다마는.
예전에 티비 명품스캔들에서 롱샹성당을 다룬 적이 있었다. 르꼬르뷔지에가 한창 때는 기계를 찬양하며 모더니즘이라는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지혼자 커버리는 바람에 난처해지게 된 꼬르뷔제 말년에 그는 롱샹을 낳았다. 어느 흐름에도 끼이지 않는 아이. 롱샹. 게의 등껍질을 보고 지붕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도 하는데 뭔가 다르긴 다르다. 정말 늘 한시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건축이 들어있어야 무엇을 보건 건축과 연결시킬 수 있는건데, 그럴라면 나는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 게 등껍질을 보면 첫째로 건축이고 뭐고 밥비벼먹고 싶을것 같다.
살며시 내부로 들어간다. 빛줄기가 여기 저기,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이색깔 저색깔, 두꺼운 네모창을 따라 이크기 저크기로 쏟아져 들어오고있다. 눈으로 보는건 사진과는 참 다르다. 그리고 글로 읽는것과도 차원이 다르다. 내 단어구사력으로는 마땅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냥 들어가면 누구나 아, 하게 된다. 나도 그랬고 내 뒤에 들어온 아줌마도 그랬고 그 옆의 아저씨도 그랬다.
아.. 이 한마디로 그냥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파란 잔디에 앉아 한참을 감상을 하고 사진을 찍고(타이머로 셀카도 찍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때보다 쉽고 시원하고 기분도 좋았다.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모르는 곳으로 떠나온 걸 좋아하고있는 나는 사실 정말 자유로운 영혼일지도 몰라. 라고도 생각했다. 롱샹에 와서 내 영혼의 정체성을 찾은 것인가. 노래를 들으며 흥얼흥얼 내려오다보니 올라올 때는 그 멀던 길을 금방 다 내려와있었다.
롱샹은 이상한 마을이다. 시골마을 치고 차들이 양방향으로 쌩쌩 많이도 달리는데 사람 그림자는 코빼기도 볼 수가 없다. 가게들은 은근히 많은데 문을 연 곳이 하나도 없다. 오늘은 수요일인데 다 어딜갔나.. 가게들도 주말에만 여는건가. 그럼 여기는 주말 마을인가? 롱샹은 시골마을이라 물가도 참 싸다. 어렵게 찾은 유일하게 문을 연 빵집(아까 길 가르쳐준 소년이 일하던 곳)에서 점심 겸 저녁을 사먹으려고 들렀다가 팽 오 쇼콜라가 0.80유로. 심지어 물은 0.50유로였다. 다 합쳐서 1.30유로밖에 되지 않았다!! 와우!! 너무싸! 우리나라보다 싸!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에 먹을 것도 사놓을걸 그랬다.
롱샹의 간이역에 홀로 앉아 기차를 기다리며 팽오 쇼콜라를 한입한입 뜯어먹었다. 기념으로 산 롱샹 성당의 히스토리가 담긴 만화책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분명히 쏘가 좋아하겠지. 무겁지만 이건 꼭 사고싶어서 언니꺼 하나 내꺼 하나 두권을 샀다.
벨포르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7분. 롱샹으로 떠나기 전 벨포르-파리행 기차가 6시 48분에 있다는걸 직원한테도 확인, 타임테이블로도 확인하고 갔는데 갔다와보니 파리행이 아닌 다른 노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헐... 오늘 파리가는 기차가 없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기차가 없다. 파리에 못간다. 내 짐이 파리에 있는데 내일 아침 뒤셀도르프로 가야되는데 오늘. 파리에. 못간다. 순간 패닉에 빠졌다. 역무원한테 따졌다.
-다른 직원이 있다그랬는데...? 왜 없어?
-몰라, 어쨌든 오늘 파리 안가
헐ㅠㅠ 나어케 그럼. 내가 알고 있던 파리가는 그 기차는 파리 바로 전 역인 Troyes까지만 가는 노선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아.. 멍청이멍청이멍청이같으니라구. 일단, 어쨌든 그 기차를 타자. 조금이라도 파리에 가까워져야 한다. 거기 가서 버스를 타던 다른 열차를 타던 역에서 노숙을 하던가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은 Troyes역에 도착한 순간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기실로 들어온 나를 흘끗흘끗 보던 흑인언니들이 나에게 Money있냐고 물어본 그 순간 말이다.
도망치듯 역을 나와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벨포르 2탄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호텔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어딘가에서 첫 차가 있을 때까지 5시간 쯤 때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충 돌아다니는데 누군가 내 5m쯤 뒤에서 계속 슬렁슬렁 따라오고 있는게 보였다. 내가 길을 건너면 슬슬 건너고, 내가 멈추면 슬슬 멈췄다. 분홍색 세로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마르고 키가 호리호리하게 큰 남자였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나에게 다가오더니 혼자나며, 방을 찾고 있냐며, 자기가 방값 내줄수 있다고 술이나 하러가지 않을래? 했다. 헉, 농! 이라고 소리치고 또다시 도망쳤다.
이것으로 Troyes는 최악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도저히 방을 잡지 않고는 이 도시 이 거리에 한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돈이라도 많으면 아무 방이나 잡아서 맘편히 잘텐데. 차라리 돈이 한푼도 없으면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을거다. 쫓아오는 아저씨 쯤이야 단호히 거절하면 돌아서니까. 많지도 않은 어설픈 돈을 아까워서 꼭꼭 껴안고 있으면 그 때 주위에 위험이 몰려오게 된다. 위험한 일은 애초에 만들질 말자 하고 아빠랑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돈 몇푼 아까워 노숙을 하려던 마음을 접고ㅠㅠ(무서워서) 호텔로 들어갔다. 리셉션 할아버지는 나의 디스카운트 플리즈를 단호히 뿌리치고 캐쉬? 비자?를 외치시는데 거기서 차마 다시 거리로 나올 수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비자........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47유로. 7만원. 하룻밤에 7만원! 한시간에 만원ㅜㅜ 이럴 때 친구랑 같이 왔다면 반반씩 나눠낼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한다. 혼자인 것은 돈 때문에 또 아쉬움을 남긴다. 아니 애초에 함께라면 무섭지도 않았겠지. 식비로 23유로를 아끼려면 얼마나 굶어야 하는가ㅠㅠ 기념품을 포기할 순 없고 내가 줄일 수 있는건 오로지 식비 뿐인데. 이제까지 열흘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식당한번 가보지 못했는데ㅠㅠ 이 곳에서 나는 서러움이 폭발해버렸다. 서럽다 서러워.
미리 예약해둔 암스테르담 숙소도 No show하는 바람에 하루치 숙박비가 그대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 이런 지출 안되는데. 그래 내 이 방을 쓰고 또 써주리라. 방에 준비되어 있는 물품은 모두 다 쓰기로 결정했다. 그래봤자 양치컵, 비누, 샴푸, 옷걸이, 수건, 드라이기, 사탕밖에 없었지만 비누로 속옷도 빨고 양말도 빨고 샴푸도 펑펑 다 쓰고 드라이기로 빨래도 다 말렸다! 속좁게도 이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위로였다.
베낭하나 달랑 메고 프랑스 낯선 곳에서 이틀 밤을 보낼 줄 꿈에도 몰랐다. 이틀동안 입고 있는 옷에선 먼지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머리는 기름져가고 양말은 썩어간다. 난 그저 롱샹을 다녀오고 싶었을 뿐인데 그 대가가 이리도 비싸다니. 암스텔담도 포기하고 로텔담도 포기하고 나는 너를 보러 왔는데 나에게 내일의 뒤셀도르프까지 포기하게 할 작정이니?
안돼 그럴 순 없어 ㅜㅜ 내일 아침 5시 5분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가서 9시 9분 saarbrucken행 기차를 타고 뒤셀도르프로 갈거다. 생각해보니 그 흑인언니랑 분홍변태아저씨한테 한국말로 욕이라도 해줄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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